영화 ‘택시 운전사’ 광주 민주화항쟁 현장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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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광주의 참혹한 현장을 생생하게 담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감동 영화

택시운전사 만섭과 독일기자의 끈끈한 동지애

그리고 당시 독재정치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 ‘택시 운전사’ 줄거리

개봉 첫 날부터 70만 관객을 끌어 모으며 흥황리에 개봉된 택시 운전사 영화를 기대에 찬 마음 반 역사 속 궁금한 마음 반으로 보게 되었다. 리얼한 연기력을 뽐내는 송강호의 연기력도 내심 기대되었다.
병으로 아내를 보내고 어린 딸과 어렵게 살아가는 주인공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가 서울에서 광주까지 가게 되는 여정과 광주에 도착해서 벌어지는 가슴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이 펼쳐진다.

둘은 서로 다른 민족이지만 동일한 아픔을 느끼며 광주 학살의 장면을 세상에 알리고자 혼신의 노력을 하지만 그들의 생각대로 취재는 호락호락 하지 않고 위험한 국면에 계속 부딪히게 된다.

만섭은 서울에서 거주하던 터라 광주라는 도시가 이렇듯 심각한 사태였는지 직면하지 못했던 상황에 놀라고, 사람들이 비참하게 학살 당하는 모습에 경악하며 놀란다. 처음 광주로 오기까지 그는 택시비 10만원을 벌기 위해 모르는 동료의 손님을 가로챈 죄책감도 못 느끼고 오직 밀린 방세와 딸을 위해 나섰지만 그에게 닥친 현실은 참혹하고 그제야 만섭은 광주로 온 것을 후회하게 되지만, 서울로 돌아갈 길도 평탄치 않았다.

집에 홀로 남겨둔 어린 딸을 위해 서울로 얼른 돌아가야 하기에 광주를 나서지만, 광주항쟁의 피해시민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키고 다시 광주로 향하는 만섭. 그가 광주항쟁으로 학살 당하는 시민들을 세상에 알리고자 힌츠페터와 다시 한 몸이 되어 어렵게 촬영에 성공, 무사히 녹화테잎을 방송에 내보냄으로써 광주의 사태를 세상에 알리게 된다.

힌츠페터는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만섭의 이름을 물어본다. 만섭은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김사복이라며 둘러대고 그 둘은 그렇게 헤어진다. 이후 독재를 벗어나 민주화의 가도를 밟은 한국을 추억하며 힌츠페터는 자신을 도운 택시 운전사를 찾으려 김사복이라는 이름으로 수소문하지만 끝끝내 찾지 못하는 것으로 영화는 결말을 맺는다.

 

이 영화의 핵심은 광주항쟁으로 인한 광주시민 무차별 학살을 알리고자 한 택시 운전사 만섭과 독일기자의 촬영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묘사하고 광주시민의 처참한 역사적 현장을 그린 영화이다.
여기서, 광주민주화항쟁의 역사 속으로 잠깐 들어가 보도록 하겠다.

 

 

 

1980년 5.18 민주화항쟁의 배경

5·18 광주민주화 운동은 ‘광주민중항쟁’, ‘광주시민항쟁’, ‘광주항쟁’, ‘광주의거’ 등으로 불리우나, 과거에는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광주사태’, ‘폭동’ 등으로 보도되기도 하였다.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다가 강원도 사북사태(
, 4월 19∼4월 24일)로 대표되는 생존권 문제로까지 확산되었다. 5월 1일 대학의 학원문제가 교외로 확산되면서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부산·대구·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


경과

이 운동이 김대중의 배후조종이나 계획적인 무장봉기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외부의 지시나 조종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기에는 그 발단이 자연발생적이었다.
신군부를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이 국민을 억압하려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광주에서의 공수부대 중심의 무력진압이 학생과 시민의 분노를 유발하였고 진압의 강도가 높아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무력저항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로 다시 무력항쟁으로 상승되었다.
5월 13일 서울에서의 가두진출에 자극을 받은 광주의 대학생들은 14일과 15일 가두에 진출하였고, 5월 16일 다른 지역에서는 소강국면에 접어들었으나 광주에서는 야간에 횃불시위가 감행되었다.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결과

광주에서 일어난 힘의 투쟁의 결과 신군부의 권력은 확고해졌다. 이들은 김대중과 주요 재야인사들,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을 내란기도 혐의로 구속하였다.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7월 14일 김대중 일당 내란 음모사건이 발표되었다.
결국 신군부의 집권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8월 16일 최규하(
) 대통령이 잔여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하야함으로써 전두환은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선거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서 전두환 정권의 공식 출범이 가능하게 되었다.

 

◇ 감상문

당시 광주시민들은 언론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무분별한 군사정권에 맞서 정의를 외쳤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 이후에도 광주시민들은 수많은 사건을 통해 민주화를 위하였다.

민주화를 향한 갈망이 비단 광주시민들만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지금 우리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데에 있어 큰 불씨가 되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참조자료] 1980년 5.18 민주화 항쟁의 배경

3 thoughts on “영화 ‘택시 운전사’ 광주 민주화항쟁 현장속으로

  1. 윗 세대들의 가슴 아픈 역사로만 알고 있었던 광주 민주화항쟁을 영화를 통해서 보니 마음이 아프고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많은 희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뭔가 위로와 보상이 주어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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